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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11년이 넘었다. 아이는 셋이다. 이렇게 쓰면 어딘가 안정적인 가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부부도 많이 싸웠다. 신혼 때는 치약 짜는 방향 같은 걸로 싸웠고, 첫째가 태어난 뒤에는 잠 못 자는 서로에게 날을 세웠고, 셋째가 태어난 뒤에는 싸울 힘도 없어서 냉전을 했다. 부부싸움의 형태가 체력에 따라 진화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싸움의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사이가 갑자기 좋아져서가 아니다.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이 생각보다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규칙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결혼 10년차 전후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 특히 아이 키우면서 배우자와 자꾸 부딪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됐으면 한다.

사진: Unsplash, Priscilla Du Preez
부부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피곤함'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가 크게 싸운 날의 공통점은 주제가 아니라 컨디션이었다. 아이 셋을 재우고 나면 밤 10시가 넘는다. 그 시간의 나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고 온 상태고, 아내는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린 상태다. 둘 다 배터리가 3% 남은 스마트폰 같은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하니, 어떤 주제든 싸움으로 번졌다.
개발자답게 표현하자면, 문제는 로직이 아니라 리소스 부족이었다. 같은 코드도 메모리가 부족하면 죽는 것처럼, 같은 대화도 체력이 바닥이면 싸움이 된다. 이걸 인정하고 나니 해결 방향이 명확해졌다. 대화의 내용을 고치는 게 아니라, 대화의 조건을 고쳐야 했다.
규칙 1. 밤 10시 이후에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첫 번째 규칙이자 가장 효과가 컸던 규칙이다. 아이 교육 문제, 돈 문제, 양가 부모님 문제 같은 무거운 주제는 밤 10시 이후에 절대 꺼내지 않는다. 꺼내고 싶은 쪽이 "이거 주말에 이야기하자"라고 예약만 걸어둔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지금 이야기하면 5분이면 끝날 것 같은데 왜 미루나 싶었다. 그런데 몇 번 해보니 알겠더라. 밤 10시의 5분짜리 대화는 실제로는 40분짜리 감정 소모전이 된다. 같은 주제를 토요일 오전에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정말로 5분 만에 끝난다. 결론도 더 합리적이다. 피곤할 때 내린 결정치고 좋은 결정을 본 적이 없다.
이 규칙의 핵심은 '예약'이다. 그냥 미루기만 하면 한쪽은 회피당했다고 느낀다. "안 하겠다"가 아니라 "언제 하겠다"를 정해야 서로 안심이 된다.

사진: Unsplash, Joel Henry
규칙 2. 집안일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분담하는 것'이다
결혼 초에 내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내가 설거지 도와줄게." 지금 생각하면 이 문장 자체가 문제였다. '도와준다'는 말에는 집안일의 주인이 아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매일 하는 일을 남편은 가끔 하면서 생색까지 내는 셈이니, 고마움보다 서운함이 쌓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집은 담당제로 운영된다. 설거지와 분리수거, 아이들 아침 등원 준비는 내 일이다. 아내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일이다. 회사에서 내 담당 업무를 누가 시켜야 하는 게 아닌 것과 같다. 담당이 정해지니 "왜 안 했냐"는 잔소리도, "해줬는데 왜 몰라주냐"는 서운함도 사라졌다.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상대가 힘들어 보이면 그때 백업을 해주면 된다.
담당을 나눌 때 팁이 하나 있다면, 잘하는 일이 아니라 덜 싫어하는 일을 맡는 게 오래간다. 나는 요리는 못 하지만 설거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설거지를 맡았다. 10년 넘게 유지되는 걸 보면 이 배분이 맞았던 것 같다.
규칙 3. 일주일에 한 번, 아이 이야기 없는 대화 30분
아이 셋을 키우다 보면 부부의 대화가 전부 업무 회의가 된다. 첫째 학원 상담, 둘째 예방접종, 셋째 기저귀 재고. 어느 날 문득 세어보니 아내와 나눈 대화 중에 아이와 무관한 이야기가 일주일에 채 10분이 안 됐다. 부부가 아니라 육아 법인의 공동대표 같았다.
그래서 만든 게 주 1회 30분 대화 시간이다. 보통 토요일 밤, 아이들이 다 잠든 뒤에 거실에서 맥주나 차를 한 잔 두고 앉는다. 규칙은 하나다. 아이 이야기 금지. 처음에는 어색했다. 아이 빼고 나니 할 말이 없어서 10분 만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좀 충격이었다. 연애할 때는 밤새 통화하던 사람들인데.
몇 주 하다 보니 근육이 다시 붙었다. 요즘 아내가 보는 드라마 이야기, 내가 회사에서 겪은 황당한 일, 나중에 둘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대단한 대화는 아니다. 그런데 이 30분이 있는 주와 없는 주는 부부 사이의 공기가 다르다. 서로를 부모가 아니라 사람으로 다시 보게 되는 시간이라서 그런 것 같다.

사진: Unsplash, Katie Puzatova
규칙 4. 돈 이야기는 정기적으로, 감정 없이
부부싸움의 단골 주제가 돈이다. 우리도 그랬다. 그런데 잘 뜯어보면 돈 자체보다, 돈 이야기를 꺼내는 타이밍이 문제였던 적이 많다. 카드값이 많이 나온 날 갑자기 "이번 달 왜 이렇게 썼어?"라고 물으면, 그건 질문이 아니라 추궁이 된다. 듣는 쪽은 방어부터 하게 되고, 대화는 시작하자마자 감정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월 1회 가계 결산을 정례화했다. 매월 첫째 주말에 30분, 지난달 지출을 같이 열어보고 이번 달 큰 지출 계획을 공유한다. 정기 일정이 되니 신기한 일이 생겼다. 같은 이야기인데 아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월간 결산 회의를 하면서 화내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문제를 사람에게서 분리해서 숫자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상금 문제, 양가 용돈 문제처럼 예민한 주제도 이 자리에서 다룬다. 예민한 주제일수록 즉흥적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게 11년 치 데이터에서 얻은 결론이다.
규칙 5. 사과는 빠르게, 원인 분석은 나중에
개발자 생활을 오래 하면 장애 대응 원칙이 몸에 밴다. 장애가 나면 일단 서비스부터 복구하고, 원인 분석은 상황이 안정된 뒤에 한다. 복구보다 원인 규명을 먼저 하겠다고 서버를 붙잡고 있으면 피해만 커진다.
부부싸움도 똑같다는 걸 한참 뒤에 깨달았다. 싸움이 났을 때 그 자리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면 싸움은 무조건 길어진다. 지금 우리 부부는 일단 복구부터 한다. 내가 말이 심했다 싶으면 잘잘못 계산 전에 먼저 사과한다. "아까 말투는 미안했다" 정도면 된다. 전체 잘못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명백한 내 지분만 먼저 인정하는 거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 둘 다 평온해졌을 때 짧게 회고를 한다. 그때 이야기하면 "사실 그날 내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거나 "그 말이 유독 서운했다" 같은 진짜 원인이 나온다. 싸움 당일에는 절대 안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사과가 빠를수록 회고의 품질이 좋아진다는 것도 장애 대응과 똑같다.

사진: Unsplash, Amy Humphries
효과 없었던 방법들도 있었다
규칙 이야기만 하면 처음부터 잘한 것처럼 보일까 봐, 실패담도 적어둔다. 우리 부부가 시도했다가 접은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편지 쓰기였다. 어디선가 부부 사이에는 말보다 글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도했는데, 우리에게는 안 맞았다. 나는 글로 쓰면 자꾸 논리적으로 정리하려 들어서 편지가 보고서가 됐고, 아내는 그 보고서 같은 편지를 받고 더 서운해했다. 부부 관계 조언은 유행을 타는데, 유행하는 방법이라고 우리에게 맞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는 무조건 그 자리에서 풀고 자기였다.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실천했더니, 밤 12시 넘어서까지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다가 싸움이 2차전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우리에게는 차라리 하루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는 쪽이 나았다. 물론 냉전을 며칠씩 끌면 안 되니, "내일 이야기하자"고 한마디는 하고 잔다. 이것도 결국 규칙 1의 변형이다.
세 번째는 기념일 이벤트로 만회하기였다. 평소에 쌓인 게 있는데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큰 선물로 퉁치려고 하면, 그 순간은 좋아도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었다. 관계는 이벤트가 아니라 평일의 운영에서 결정된다는 걸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인정했다. 연 1회의 감동보다 주 1회의 30분이 세다.
아이들 앞에서 싸웠을 때의 원칙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하나 더 생긴 원칙이 있다. 아이들 앞에서 언성이 높아졌다면, 화해도 아이들이 보는 데서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첫째가 물었다. "아빠, 엄마랑 싸웠어?"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우리는 안방에서 화해했지만 아이는 싸우는 장면만 봤던 거다.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가 싸우고 그걸로 끝인 세상을 산 셈이다. 그 뒤로는 아이들 앞에서 부딪힌 날에는 일부러 아이들 앞에서 사과한다. "아까 아빠가 엄마한테 말을 심하게 했어. 미안하다고 했고, 화해했어." 이렇게 한 문장이라도 보여준다.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끼리 싸웠을 때 사과하고 회복하는 모습이 달라졌다. 갈등이 없는 집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갈등을 수습하는 모습은 보여줄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부부싸움이 육아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규칙이 부부 사이를 삭막하게 만들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끔 듣는 말이 있다. 부부 사이에 무슨 규칙이냐, 정 없어 보인다는 반응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생각한다. 규칙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컨디션과 눈치에 모든 걸 맡겼고, 그 결과가 반복되는 싸움이었다. 규칙은 애정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애정이 소모되지 않게 지켜주는 가드레일에 가깝다.
물론 이 규칙들이 모든 부부에게 맞지는 않을 거다. 우리도 시행착오 끝에 우리에게 맞는 형태로 다듬은 거고, 지금도 조금씩 바뀐다. 중요한 건 규칙의 내용이 아니라, 부부가 같이 앉아서 "우리 이렇게 해보자"고 합의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 같다. 그 합의를 해본 부부와 안 해본 부부는 싸움의 회복 속도가 다르다.
우리 부부만의 규칙을 만들고 싶다면
혹시 이 글을 읽고 우리 부부도 규칙을 만들어볼까 싶은 분이 있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순서를 남겨둔다.
먼저, 싸움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 시작해야 한다. 싸운 직후에 "우리 규칙 만들자"고 하면 그 규칙 자체가 상대를 겨냥한 조항처럼 느껴진다. 아무 일 없는 주말에 "요즘 우리 싸우면 서로 너무 소모되는 것 같은데, 몇 가지만 정해볼까?" 정도로 가볍게 꺼내는 게 좋다.
둘째, 한 번에 하나씩만 도입한다. 우리도 다섯 개 규칙을 한꺼번에 만든 게 아니다. 밤 10시 규칙 하나로 시작해서, 그게 자리 잡는 데 두어 달 걸렸다. 규칙을 목록으로 만들어 벽에 붙이는 순간 그건 규칙이 아니라 사규가 되고,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다.
셋째, 어기는 날을 전제로 한다. 우리도 밤 11시에 언성을 높이는 날이 여전히 있다.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게 아니지만, 어겼다고 자책하거나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쓰면 역효과다. "아, 우리 10시 넘었다. 내일 하자." 이 한마디로 웃으며 끊을 수 있는 안전장치 정도로 생각하는 게 오래가는 비결이다.
마지막으로, 몇 달에 한 번은 규칙 자체를 점검한다. 아이들이 크면서 생활 패턴이 바뀌면 규칙도 낡는다. 막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뒤로 우리 부부의 저녁 시간이 달라졌고, 대화 시간도 토요일에서 평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규칙은 완성품이 아니라 계속 배포되는 서비스에 가깝다.
결혼 10년차 이후, 대화의 총량보다 중요한 것
신혼 때는 대화의 양이 많았다. 지금은 그때만큼 많지 않다. 처음에는 이게 관계가 식은 증거인가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11년쯤 살아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중요한 건 대화의 총량이 아니라, 필요한 대화가 필요한 때에 이루어지는가였다.
무거운 주제는 주말 오전에, 돈 이야기는 월 결산에서, 서로의 안부는 토요일 밤 30분에. 이렇게 자리가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평일의 침묵이 편안해졌다. 말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상태. 그게 연차가 쌓인 부부의 안정감이라는 걸 요즘 느낀다. 말수가 줄어든 것과 관계가 식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대신 짧은 신호는 자주 보내려고 한다. 출근길에 "오늘 셋째 병원 잘 다녀와"라는 메시지 하나, 퇴근길에 "뭐 사갈 거 있어?" 한마디. 대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크기지만, 이런 잔신호가 끊기지 않는 게 긴 대화 몇 번보다 관계 유지에는 효과적이었다. 서버로 치면 헬스체크 핑 같은 거다. 응답이 계속 오가는 한, 연결은 살아 있다.
결혼 11년차의 결론은 소박하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결혼 생활은 운영이다. 감정은 관리할 수 없지만 운영은 개선할 수 있다. 그리고 운영이 안정되면, 신기하게도 감정이 돌아올 자리가 생긴다. 오늘 밤에도 아이들 재우고 나면 아내와 차 한 잔 마시면서 시시한 이야기나 해야겠다.
